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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열두 번째 숨소리

 

 

 

우웅─.

 

오늘로 열두 번째. 깊은 바닷속에서 피어올라 하늘을 가르는 세계의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는 언제나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에서 사라졌다. 높게 솟은 절벽과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불규칙한 음율을 내며 끝없이 부딪히고,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앞으로 광활히 펼쳐진 바다는 언제나 흐릿하여 그 끝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장소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등 뒤로 바람에 풀잎들이 휘날리며 고개를 숙였다. 바람의 속삭임은 때로 낡은 책장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처럼, 때로는 웃음소리의 파편처럼 들려왔다. 누군가의 이름이나 잊혀진 것들을 품은 채 불어오는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증명시키듯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교차하는 소리와 바람을 품은 채 몸을 숙여 발 아래 새겨진 이름에 손을 올린다. 손끝에 스치는 차갑고 거친 돌의 감촉이 유난히 선명히 느껴졌다. 마모된 글자를 따라 손끝을 더듬고, 숨을 삼키며 그 이름을 내려본다.

 

「----」

 

이 세계에 슬픔을 가져다준 이의 이름이었다.

 

 


 

 

소멸된 기억을 붙잡는 것은 과연 올바른가,
배출해 버린 노폐물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끝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걸음을 지나버린 기억으로 붙잡는 것이. 



“그때 네가 그랬어.”

 

고요한 바람 속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네가 그랬다고, 분명.”

 

뻗은 손끝을 타고 온 풀 냄새가 시야를 밝힌다. 느릿하게 돌아간 고개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기껏해야 자신의 가슴께까지 올라온 머리. 분명한 어린아이의 형태를 띠었으나 얼굴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조용했고, 오랜 시간에 덧씌워진 침묵처럼 눈빛은 이 세계의 모든 시간을 훑고 온 듯 깊어 보였다. 

 

우우웅─.


침묵의 틈을 비집고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멸된 기억의 울림이다.

 

“내가… 뭘?”

 

아이의 눈동자에 비추어진 자신은 의아함을 품고 있었을까.

자신이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비춘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고통, 사랑, 증오, 슬픔. 그것들을 품고 가기엔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 유약했고, 대부분의 생명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한한 소멸을 지속했다. 노폐물과 같은 그것은 생명은 이어지지 못하게 하고 앞으로 향하는 걸음을 끊어버렸다. 이곳에서 기억은 수많은 선택과 감정에 영향을 주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강렬한 기억일수록, 뜨거운 감정을 느낄수록 더욱 빠르게 소멸해 시켜버리고는 했다. 

무한한 생성을 지속하되 멈추거나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었다.

그러니 그 말은 진작에 흘려보냈을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문장이다.

 

목소리를 낸 아이는 손을 내리고 성큼 걸어와 앞에 섰다. 삐죽이는 입술로 팔을 잡고 걸음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 힘에 맞서려는 순간, 아이의 눈은 나를 꿰뚫듯 했다. 녹빛 내음과 함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자신을 관통한다.

 

“가기 싫다고 말했잖아.”

 

느슨해진 팔을 밀어 떨어뜨리곤, 아이를 마주 보았다.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언젠가 자신이 흘려보냈던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음에도 입술 끝에서 기억이라는 단어가 맺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에서 유를 묻는 것이라면, 그에 맞는 질문이 나와야 마땅할 것을. 물음 속에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소멸된 감정, 소멸된 기억의 근원. 자신에겐 그것을 물을 자격조차 없음을 무의식 속에서 되냈다.

 

“ 그걸 네가 어떻게 기억해?”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나뭇잎에 닿아 부수어진 햇살의 조각들이 머리 위로 내려앉고 퍼진 색채가 그의 눈에 담긴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음에도 빛을 내며 선명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비추어지지 않는다. 그에겐 ‘우리’ 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넌 뭐야?”

 

“….”

 

한 차례의 침묵. 열린 입술을 타고 무지개색을 띤 빛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린다. 그의 조각들은 햇빛을 따라 반짝이며 눈동자를 쓸었다. 숨은 죽인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자신에게 스며든다. 짧은 숨을 머금은 채 아이를 응시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무척 빛났지만,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마치 너무 많은 것들이 붙고, 뒤섞여 본래의 것이 사라진 것마냥. 숨소리가 숲에 있는 모든 잔가지를 해치고 지나오듯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왜 대답을-”

 

“그냥, 떠나지 않았어. 그 기억 말이야.”

 

“…뭐?”

 

짧은 간극이 이어졌다. 뒷걸음질 치려는 내 의지를 꿰뚫어 보듯, 작은 손이 불쑥 뻗어왔다. 내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아이는 차가워진 내 손을 낚아채어 강제로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이 뛰는 그곳으로 가져다 댔다.

 

“직접 느껴. 이건 너의 기억이니까.”

 

쿵, 쿵쿵. 

 

당혹스러운 감정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숨과 함께 멈추었다. 불규칙한 리듬이 손끝을 타고 전해왔다. 낯설지 않은 울림에 잠시 숨이 묶였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울림이 아이로부터 오는 것인지, 내 심장 인지, 혹은 둘 사이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웠다. 마치 오래전, 한 번쯤 맞닿았던 떨림과 같았기에. 

 

오래 묻어둔 기억의 조각을 건드리듯 박동 소리를 따라 읊으며 더듬던 그때,

 

우우우우우우웅─!

 

긴 울음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듣지 못한 거대한 공명.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적이 있었나? 처음 기울여본 것임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불길한 음. 귓가에 전해오는 소리는 고통으로부터 피어난 것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피어난 것’ 어딘가에서 건너온 듯한 단어가 머릿속을 유영하듯 떠돌다가 가라앉는다. 바람이 식어가고, 향하던 걸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하늘의 색채가 회빛으로 뒤덮이며 반복되는 일상의 한 파편을 건져 올린다.

 

매일 아침 7시. 거리는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리는 수천 개의 발소리로 채워졌다. 우리의 일과는 강렬했던 기억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파도가 치는 절벽의 끝으로 향하는 적막한 행진. 회빛 하늘과 도시. 차가움이 내려앉은 행렬을 따라 우리는 멈추지 않고 차례로 앞으로 향해 걸었다.

 

건져 올려진 기억 속에도 파도 소리나 울음소리가 빼곡히 자리했다. 절벽의 끝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앞서 나간 이 들이 손에 쥔 이름을 하나씩 흘려보낼 때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떨리던 손끝이 한순간에 멈추는 것을 보며 나 역시 파도에 기억을 적셔 흘려보냈다. 울음소리 뒤로 찾아오는 것은 공허였으나 우리는 그것에 익숙했다.

 

“…!”

 

급히 그에게서 손을 떨어뜨리자, 소리가 잦아들었다. 떠오른 회색빛 풍경은 흩어졌으나, 자신에게 닿은 공허의 감정만은 남아있다. 이제는 아이가 잡지 않아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자신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고통이라니. 멋대로 튀어나온 것이 내 감각을 부정하고 있었다. 낯선 떨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인가, 건져 올라온 파편에 담긴 두려움인가. 두려움이라면, 무엇이?

 

“너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읊던 소리가 거대해지며 심장을 강하게 압박했다. 가슴을 죄어오는 압박은 낯설지 않은 감정이었다.

 

나비가 날개를 접고, 보라색 꽃잎에 내려앉는다. 차가운 비석 아래로 파도 소리가 조용히 찰싹이며 들려온다. 하늘은 햇살이 부수어져 퍼진 듯 맑은데도, 서 있는 장소는 그림자를 새기듯 흐릿하고 어두운색으로 물들어 변해간다. 파도 소리가 잦아들면, 언젠가 들었던 한 문장이 떠오르며 형태를 잡는다.

 

‘상실을 추억한 자의 말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두고 다들 그렇게 불렀다. 그리곤 경고라도 남기듯 말했다. 기억을 남겨 두면 결국 생명 역시 끊어지고 만다고. 그는 멈추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자신은 안다. 그것 역시 결국 소멸될 것이기 가능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몇 번씩 새겨진 글자를 다시 읽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그것이 아니었다.

 

「메모리아」

 

이제는 없어진 이의 이름. 그는 나의 스승이자 친구였고, 이해자였다.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 태어났으나 그는 모두가 걷는 길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고통, 사랑, 증오, 슬픔. 모두가 노폐물이라 명하는 것을 그는 버리지 않고 기꺼이 품으며 살아갔다. 소멸을 담은 고래의 울음소리가 고통이라고 했던가….

 

나도 모르는 새, 선명해진 기억은 더욱 깊은 과거로 흘러 들어갔다.

 

“무섭지 않아?”

 

“뭐가?”

 

“죽는다는 거.”

 

우리는 가끔 파도가 치는 곳으로 걸어가 고래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해가 저무는 언덕 위에서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다. 스쳐 지나간 바람을 손에 쥐어보기도 하고, 지나온 자리를 따라 걷기도 했다. 멈추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서 그와 함께 한 것들은 땅의 끝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그때도 그러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절벽의 끝. 소리는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채 찬란히 부수어졌다.

 

“딱히.

 …는 무슨, 당연히 무섭지.”

 

“그런데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씨익, 웃어 보인 미소는 예감했다는 얼굴이었다. 이어 소리 내 웃어 보이기까지 한 이는 손을 뻗어 하늘을 향했다. 허공에 있는 것이라곤 바람과 공기뿐인데도 그에게 남은 기억을 품어 올리듯 손끝을 움켜쥐며 붙잡았다.

 

“그런데 왜 기억을 소멸시키지 않냐고? 내가 무서운 건, 내 죽음이 아니야. 내가 느꼈던 것들의 소멸이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미워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걸 기억해 줄 사람은 나뿐이잖아.”

 

“….”

 

“흐음~ 왜? 네가 기억해 줄래?”

 

침묵한다. 자신은 그런 이였다. 그와 같이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게 태어났으나 한 줄로 이어진 행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앞으로 향하는 것만이 살아 있음의 증명이고, 멈추거나 돌아서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내일이면 나는 이 기억을 또 흘려보내겠지. 모두가 그렇게 말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기에 자신 역시 그 행렬에 섞어 걸음을 지속했다. 맞지 않는 틈에 몸을 구길지언정 방향을 틀지는 못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농담. 그래도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라고 믿어.”

 

그가 남긴 한마디는 결국 파도에 잠겼다. 하지만 상실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글자로만 남은 그의 부재는 상실을 넘어, 내가 의지하던 세계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두 세계를 드나들던 걸음이 막히고 만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익숙하리라 믿었던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공허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하지만 무너져 내린 세계를 등진 채 등을 떠미는 것들은 여전했다.
우리는 서로가 나아가기를 원했고, 정체되지 않았으면 했으며. 그것이 곧 살아 있음이라 믿었다.

 

우우웅——

 

상실을 품고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가졌던 것이 소멸되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상실을 되돌아보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멈추어 추억한다는 것은 사멸을.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게 태어난 ‘나’는 쌓여가는 것의 무게를 느끼는 대신 흘려보내는 법을 먼저 배웠었다.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순간— 이 길에서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으므로.

 

그러니 또다시 기억을 버리고 나아가자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매일 같이 흘려보내고, 쌓아가기를 반복했으면서 세계가 완전히 무너진 그때의 나는,
“가기 싫어.” 라고 답했던 것 같다. 

앞을 향해 걷는 행렬의 등 뒤에서, 나는 처음으로 등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멸 되었던 것의 복구. 깨져버린 유리 조각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으며 세계를 기울였다.

마땅히 소멸되었어야 할 것이 선명해지며 작은 균열을 만든다. 자신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나?”

 

“넌, 대체-”

 

“괜찮아.”

 

대화는 같은 방향을 보지 못한 채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때때로 충돌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터져 나온 목소리 아래 가려진 자신의 혼란을 진작에 잡아낸 듯했다.

 

“싫어?”

 

잠시 호흡이 멈춘다. 훅, 하고 폐부의 공기가 빠져나갔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모순된 침묵만이 맴돌았다. 알고 있음에도 재차 질문을 던졌다.

 

“…뭐가?”

 

“네 기분 말이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 흘러가 버린 기억은 걸음을 막을 뿐이니 그것을 붙잡아 내민다면 불쾌하리라. 그것이 이 세계에 새겨진 글귀였다. 자신 역시 그 세계의 흐름에 맞춰왔으므로 “싫어” 라는 답이 정해져 있었으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상실의 기억과 함께 모습을 감춘 과거로부터의 감정들이 고개를 든다. 손끝에 잡힌 바람, 파도와 고래 울음소리, 웃고, 울고, 화내며 담긴 뜨거운 감정의 조각들과 끝내 자신을 슬픔과 절망에 밀어 넣고 만 것. 그렇기에 더 선명하고 다채로운 것. 

 

이 모든 것들은 이 세계에서 독이었으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음의 진짜 증명.
무너졌던 세계.

 

아이는 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아무런 재촉 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래의 무덤

“세계의 끝으로 향하자. 네 답은 거기에 있어.”

 

 


 

 

 

언젠가부터 기억은 소멸을 원치 않게 되었다. 

강렬한 감정들이 쌓여 스스로 붙어 있으려 하고, 누군가에게 먹히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국 소멸되지 않은 기억들은 뭉치고, 쌓여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했다.



아이가 내민 손끝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가닥이 비어진 손바닥을 스쳤다. 작고 하얀 손.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은 뚜렷한 온기를 품은 살결이었다. 이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답을 찾으러 갈 정도의 질문이던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 그 또한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손을 뻗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잠깐 스쳤던 기억의 잔향이 선명하고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머뭇임 속 아이의 손을 잡자 깊은 울음소리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곧 파도와 함께 삼켜지듯 몸이 심해 한 가운데 잠기었다가 다시 떠오른다. 잠깐의 침잠. 멀게 느껴졌던 소리들이 갑자기 가까워졌다가 곧 다시 멀어지는 이상한 반향. 거세게 회오리치는 물줄기의 틈으로 빛이 내려왔다. 곧 발이 닿는다.

 

망각의 순례길. 

 

모래바람이 부는, 잊혀진 기억들이 향하는 황량한 이 장소를 아이는 그렇게 불렀다. 내린 발 사이로 작은 입자들이 파고들어 와 덮었다. 하늘 위로 태양이 떠 있는데도, 발 위로 수북이 쌓여진 모래들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막에서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 끝과 시작이 겹치는 지면의 끝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표정을 가린 채 한 방향으로 이어진 행렬. 그들은 아무런 언어를 갖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돌려도 계속해서 밝히는 터에 결국 입을 열었다.

 

“…저건 뭐야?”

 

“기억”

 

예상했다는 것처럼 짧은 답이 돌아왔다.

 

“저게 기억이라고?”

 

“그래, 기억이야. 너희가 버린.”

 

의문을 더하지 않은 건,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앞을 향하는 것이 내가, 아니 우리가 살아온 삶과 퍽 닮아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자신이 버린 것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침묵 후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건,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

 

아이가 가리킨 손끝을 따라 검은 선들에 시선을 둔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행렬의 옆으로 비정형적인 형태로 뭉쳐 나아가지 않는 조각들이 있다. 그것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듯 서로 뭉친 채 길을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듯 보였다.

 

한참 동안 그것에 시선을 두었다.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 사실, 한동안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붙잡아 버티고 있는 기억이라니, 아이는 의문을 품은 나를 둔 채 행렬에서 벗어나 몸부림치는 조각들에 손을 얹었다. 손이 닿자, 끝에서 옅은 빛이 피어올랐다. 공명하듯 뭉쳐진 것들의 형체가 한번 크게 뒤섞였다가 단단히 자리한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느꼈던 감정의 잔향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부서진 언어처럼, 들릴 듯 말 듯한 기척이 흘렀다. 

 

발밑의 모래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소리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들은 낡은 오르골 소리와 닮아있었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노랫소리에 실려, 삭막한 바람 대신 은은한 홍차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착각이 들었다.

 

붉은빛이 스며들어 오는 시간. 먼지 쌓인 가게. 빛을 받아 유유히 떠오르는 먼지 입자들이 시간을 붙잡듯 느리게 떠오른다. 나무 테이블 위로 낡은 오르골을 내려둔 이가 목소리를 냈다. 나무로 깎여진 새 모양의 오르골 장식은 옻칠 하나 없이 거칠고 투박하여, 솜씨 좋은 장인의 작품이라기보다 누군가 서툴게 만들어 붙여둔 것 같았다.

 

“이건 어때?”

 

“별론데”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스친 표정에는 실망인지, 장난스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얇게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답은 개의치 않다는 듯 오르골의 태엽을 감아 돌리며 익숙히 말을 붙였다. 드르륵, 드르륵- 체인이 감기는 소리가 방 안에 느리게 퍼진다.

 

“전에는 좋다고 했으면서.”

 

“내가?”

 

자신의 의문에 과장스레 고개를 저은 이는 “이래서 기억이 필요하다니까.” 라는 말을 장난스레 던졌다. 그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자신은 알 도리가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반복되는 멜로디를 들으며 한참이나 떠오르지 않을 것을 눈에 담은 채 있었다.

 

“─가자.”

 

틈에서 꺼내 오듯 장면을 파고든 목소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생각의 흐름이 끊어진다. 여전히 자신은 황무지 한 가운데에 있었다. 선 채로 꿈을 꾼 것인지, 생경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손과 앞에 선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벌려진 거리에 의문을 던질 새도 없이 발걸음에 따랐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발밑을 채우던 건조한 모래의 감각이 돌연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감촉으로 변한다. 귓가를 때리던 삭막한 바람 소리 대신, 이번에는 낡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이거 읽어 봐."

 

다정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아지랑이 너머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내미는 손과 서재 안. 평온한 오후였다. 바람은 들어올 생각이 없는 듯 창가에 늘어진 커튼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내민 책을 받아 들면 수북이 쌓인 먼지와 함께 오래된 질감이 그대로 살갗에 맞닿는다. 앞에 쓰 글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이게 뭔데? 메모리아와의 추억 일지.……우와. 유치해.”

 

“ㅁ,뭐? 잠깐, 잠깐. 중요한 건 내용이라고!”

 

책을 꺼낸 사다리에서 내려온 이는 부쩍. 자신에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책장을 펼친 그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손으로 글자들을 짚었다. 손끝이 글자 위를 따라 움직였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괜히 강조한 단어들. 설명하려는 말은 페이지 사이에 걸려 흩어졌고,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걸음을 계속할수록 자꾸만 그의 잔상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피어오르는 것들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점점 더 선명해져갔다. 멈추어서 손에 쥐면, 그것에 잠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꽃을 심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고, 어떤 날은 이전에 했던 일과를 똑같이 반복하기도 했다. 무채색의 배경 위로 색이 덧입혀졌다. 억지로 밀어냈던 시간들이 하나의 장면이 되어 열을 이루듯 제 앞에 쌓여갔다.

 

“멈추지 마.”

 

다만,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붙잡으려 할 때마다 아이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을 꺼냈다. 입술 끝에 맴돌던 질문을 던져냈을 때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라고 했다.

“기억은 원래 주인을 찾아가. 저것들도 너에게 중요하지만….  여긴, 버린 것들이 모이는 곳일 뿐이니까.”

 

문득,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란 것이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밀어내고 싶지 않은 잔향. 자신이 버려버린 것임에도 붙잡고 싶은 것. 걸음의 무게를 실 듯, 가슴 안쪽으로 자신의 발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기억이라면…. 생경한 감각들에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아이는 단호히 걸음을 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들을 따라 깊은 곳을 향했다. 행렬은 깊이 들어갈수록 흐트러지고 무질서해졌으며, 때로는 격렬히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는 무리에서 떨어진 것들을 다시 밀어 넣지 않았고, 자신 역시 흘러 들어오는 잔향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바람에 맞서도록 내버려둘 뿐이었다.

 

발 사이로 파고들던 소리가 점점 더 낮고 길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늘어진 그림자들을 앞질러 깊은 곳을 향할수록 바람이 점점 묵직해져 내려앉고, 주변의 공기가 엉켜 소리가 잦아들고, 내려오는 빛이 스러지며 색이 흐려진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기억들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듯 끊임없이 뻗어있고, 그것을 따라 경계를 넘듯 텅 비어진 공간으로 발을 들였을 때 적막의 틈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가 세계의 끝이야.”

 

시야가 탁 트이며, 숨이 멎을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진 짙은 남색의 공간. 중력이 사라진 듯, 거대한 물의 장막 뒤로 수천 개의 별처럼 빛나는 입자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그곳은 침묵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침묵이 되는, 세상의 모든 끝이 모이는 장소였다.

세계의 끝.

 

발을 멈추고 아이를 마주 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와 언덕 위에서 허공을 보던 그때처럼. 시선을 따라 위를 올려보자, 허공을 유영하는 수많은 고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게 내려앉은 곳에서 유일히 빛을 내는 고래들은 끝을 향해 걸어온 기억들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삼키고,

 

우우웅——

 

울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잠에 든다. 

 

답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전에, 나는 절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리의 고래가 잠에 들면, 또 다른 고래가 지느러미를 튕기며 튀어 오른다. 갓 태어난 고래는 반짝이는 별 가루를 몸에 품고 천천히 부상하여, 마치 별의 한 조각 되듯 세계에 스며든다. 기억들이 소멸하고 탄생하는 장소. 소리가 끊기고 이어지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죽음이라 부르기엔 따뜻하고, 탄생이라 부르기엔 고요한, 끝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순환의 흔적들이 공간을 메웠다. 소리가 교차할 때마다 고래들은 울음소리와 함께 잠들고, 또 태어난다. 잠들어 버린 고래들은 묵직한 시간의 무게를 품은 채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룬다.

 

그리하여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 된다.

 

낮게 깔린 울음이 진동처럼 스며들어왔다. 거대한 흐름 속에 압도되어 한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의문이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든다.

 

“…여기에 내 답이 있다고?”

 

“그래.”

 

아이의 답은 한결같았다. 질문의 답을 스스로가 찾기를 바라듯 간결하고, 단호했다.

 

“넌, 내 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예상과 같이 아이는 아무런 답 없이 시선을 내리곤 무덤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끝없이 밀려드는 기억을 차례로 삼키고 잠에 드는 고래들의 사이를 유영하는, 막 탄생한 한 마리 고래에게 손을 뻗자, 아이를 기억으로 인식한 고래 한 마리가 몸을 크게 뒤틀며 입을 벌렸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이 자신에게 엄습했다.

 

손끝이 입가에 닿는 순간, 고래의 움직임은 뚝 멈춘다. 한 심해의 숨소리조차 끊긴 듯한 짧은 정적. 거대한 몸이 한동안 아이의 곁을 맴돌다 알 수 없는 음을 담으며 몸을 돌려 떠났다. 위로 뻗었던 손이 멋쩍게 내려앉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더니, 기분에 대한 것들은커녕 새로운 질문들만 연이어 피어난다.

 

“…삼키지 않네?”

 

빛과 함께 흔들리는 꼬리가 심연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 놀란 숨을 겨우 가라앉히곤 아이에게로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나는 버려진 기억이 아니니까.”

 

아이를 응시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아이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물결은 마치 보호막처럼 부드럽게 감돌았고, 심연의 어둠 속에서도 아이만은 스스로의 색을 품으며 그 자리에 ‘실재’했다. 그것은 바닥에 가라앉아 버린 파편이 아닌, 생생하게 박동하는 생명의 색채였다.

 

“….”

 

“있지, 싫어?”

 

녹빛 시선이 제게 향했다. 빛이 스러진 이 장소에서 그 눈빛은 고래들이 품은 빛보다 더 밝고 강렬하여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질문의 울림은 손을 맞잡던 그때로 나를 끌어올렸다. 세계의 끝에 답이 있을 거라던,

 

쿵, 쿵쿵.

 

손으로 전해지던 심장 소리를 되짚었다. 

건져진 기억들과 다시 조립된 세계. 만약 그대로 소멸됐다면 자신은 이 것들을 묻어둔 채 살아갔을까? 살아갈 수 있었나?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이 당연하고 감정 역시 그것과 함께 스러진다. 회귀나 멈춤은 죽음과도 같다고 여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어떠한가? 그가 삼켜지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였나? 걸어오며 맞은 잔향을 따뜻하고 달콤하다고 여기었나?

 

되돌아온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들려오는 고래의 울음소리가 고통으로 피어났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로 기억하지 못했을 시간을 비추어 본다. 오래전 버린 줄로 알았던 작은 장면들은 바래지 않은 채 밝은 빛을 띤다. 그 눈동자에서 옛적 그의 시선을 보았다. 햇빛, 바람, 오르골, 홍차, 책. 덧입혀진 색채가 선명히 일렁였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싫지 않다는 말은, 기억을 품겠다는 말과 같았다. 이곳에 답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처음 내 의지로 멈추어 섰다. 

 

“…아니.”

 

답을 내놓은 순간 엉켜있던 실 한 겹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억지로 끼워맞추지 않아도 충분한 삶이 있다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는 균열 위에 세워진 질서에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충분히 슬픔을 안고 살아가라 말해주는 목소리. 균열 위에 놓인 발끝은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앞서 나간 이의 자취를 따라 결국, 자신 역시 흐름의 가장자리로 발을 내디뎠다.

 

“싫지 않네.”

 

아이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확신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럴 줄 알았어.”

 

“싫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싫다고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널 믿었거든.”

 

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던 기묘한 위화감이 옅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안도감이었다. 정지해 있던 회색빛 배경 위로 붉고 푸른 감정의 입자들이 눈송이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지나오면서 보았던 수많은 엉킴과 조각들의 모습이, 이제는 색을 찾은 형태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죽음 보다 두려운 것은 피어오른 감정들과 걸어온 기억들의 소멸이다. 살아 있음의 증명이라는 거창한 정의와 같이 기억이 존재하기에 세계는 선명해진다.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을 만났을 때부터?

 

“난 앞으로도, 너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찾아다닐 거야.”

 

완전히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 다시 허공에 시선을 둔 아이의 목소리에 세계가 숨을 고르듯 잠시 고요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선언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방향을 확인한 듯 담담한 투였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

 

부탁이라기엔 강요가 없었고, 명령이라기엔 조심스러운 것. 그러나 그 말이 향하는 곳은 분명했다. 이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고 기억을 품어온, 모든 이들이 향했던 곳.

 

“나?”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자신은 이제야 운 좋게 깨달았을 뿐이다. 나지막이 물음을 던졌다.

 

“그래, 너. 너는 네 기억을 붙잡으려고 했잖아.”

 

아이의 목소리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처럼 단호했다. 어떤 울림보다도 명확하게. 그는 자신이 가장 약했던 순간을 가장 강한 이유로 내밀었다.

 

그에게 자신의 대답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눈 역시 반짝이는 색채로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도 그가 할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회색의 장막이 걷히고, 고래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웅장한 화음처럼 들려왔다. 책임이었다. 버릴 수 없었기에 소멸되지 않은 나의 기억. 형체를 가진 강렬한 감정.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오래 남아 있으려고 했던 조각. 자신 역시 그것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품은 이 선명한 세계를 남김없이 새겨 넣고, 나 또한 기꺼이 저 파도 속으로 흩어지리라. 그가 그랬던 것처럼.

 

고래의 낮은 울음이 멀리서 번졌다.

정지되었던 바람이 세계의 끝을 스치고,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빛이 되어 지나간다. 

 

「메모리아」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을 대신했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소멸되는 기억이 없도록, 

이 세계에 슬픔이 오래 남아 머무를 수 있도록.

자신은 또 다른 기억이 되기 위해, 아이의 손을 쥔 채 발을 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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